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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만의 전설을 썼고, 나와의 설전을 벌였다.
| 한동규 | 201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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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요즘 힘드니?"

회사 선배에게 마라톤을 시작했다고 하니 대뜸 이렇게 묻는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또는 잊기 위해 달리는 사람이 많단다.

부인할 수 없었다.
그동안 좋은 커리어를 쌓아왔고 민간기업 직원의 신분으로 정부조직에 파견됐다.
회사를 대표해서 정부정책에 참여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영광스럽고 보람된 자리였다. 
규제특구를 정하고, 투자계획을 짜고, 만들어질 일자리 생각에 흐뭇했다.

그러나, 정책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탄핵됐고,
일하던 기관이 공중분해됐으며,
나는 원래 일하던 회사로 복귀했다.

회사엔 자리가 없었다.
경기가 좋지 않아 희망퇴직을 받던 인사팀장은 내게 곤혹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택근무와 대기발령이 이어졌고, 결국 내 전문분야와 상관없는 부서에 배치됐다.

상실감과 좌절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나름 열정을 다해 추진하던 일이 공중분해된 것이 안타까웠다.
별 것 아닌 일에 짜증을 냈고,
아내와 딸내미와도 대화가 뜸해졌다.
불혹을 앞둔 서른 아홉살에 위기가 찾아온 거다.

한여름 어느 날, 어머니가 조선일보를 건네주신다.
10월 춘천마라톤에 나가보라는 거다.

나:       마라톤을? 0.1톤의 몸을 이끌고?
어머니: 그래 너 체력장할 때 오래달리기는 잘했잖아.

나:       것도 춘천까지 가서 뛰라고?
어머니: 답답한 서울 벗어나서 머리 식히고 얼마나 좋니.

어머니 생각엔 마라톤을 뛰면 내 꼬인 마음이 좀 풀릴거라 생각했나보다.
김대중 칼럼과 만물상의 광팬인 어머니의 눈에 조선일보 행사가 좋아보인 효과도 있겠다.

마라톤은 그렇게 나를 찾아왔다.
나름 열심히 훈련을 했고, 드디어 10월의 마지막 일요일이 됐다.
오전에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제한 시간이 6시간이에요. 교통통제 부담없이 뛰세요."

서울 대회의 경우 교통통제 때문에 초보자들은 완주를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춘천마라톤은 그런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을 가볍게 하고 H그룹 출발선에 섰다. 
춘천마라톤을 권유한 어머니의 혜안에 감탄하며.

배동성MC의 명품 진행이 시작됐다.
그는 아침 6시에 용산역에서 경춘선 ITX, 그것도 입석으로 탔단다.
소속회사의 카니발차량을 거부하고 일부러 고생길을 택했다.
참가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해서 사회를 더 잘보기 위해서...
그러면서 무대 옆 아식스 사장님께 민원도 전달한다.

"내년에는 아식스에서 바지를 준비해주세요, 참가자 분들이 윗도리는 너무 많데요."
ITX에 같이 탔던 아주머니의 푸념이라나.

배동성MC의 구수한 입담에 긴장한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마침내 H그룹이 출발했고, 드론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줄넘기를 하면서 뛰시는 분,
배트맨, 스파이더맨 코스프레를 하신 분들,
한복을 입으신 분,
사회적 메세지를 전달하며 뛰시는 분들
개성있는 달리미들의 등장에 눈이 휭둥그레졌다.

최고의 백미는 당일 12시에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신부였다.
5킬로 지점까지 뛰고 출발선으로 돌아가는 그들에게
H그룹 달리미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마라톤 경기라 아니라 결혼식이었고, 코스프레 대회였으며,
더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축제였다.

스폰지와 급수대에서 자원봉사 학생들의 응원도 훌륭했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라며 달리미들을 응원했고,
박수와 함성은 그 어느 파워젤보다도 힘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춘천시민들의 응원도 뜨거웠다.
열심히 뛰라며 응원해주셨고,
도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며 격려해주셨다.

의암호와 붕어섬을 둘러싼 단풍 또한 절경이었다.
함께 경치를 즐기는 가족참가자도 있었고, 연인들도 많았다.
딸내미가 좀 더 크면 꼭 세식구가 함께 참가하리라.

하프지점인 신매대교까지는 순조롭게 달렸다.
허기질 시점에 급수대에서 초코파이를 먹었고,
고교 선배님도 우연히 만나 생수로 건배를 하며 회포를 풀었다.

위기는 25킬로지점 서상대교에서 찾아왔다.
무릎이 전두엽에 말한다.

무릎:    0.1톤의 달리는 몸을 더이상 지탱하는 건 무리야.
전두엽: 좀 더 참아봐 17킬로만 더 가면 돼.

무릎:    17킬로가 엎어져 코 닿는 거리냐? 여의도에서 잠실야구장 거리야.
전두엽: 그럼 GG치자. (GG: Good Game, 경기종료를 의미하는 말)

더이상 달릴 수 없었다.
무릎에 전기충격기 가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회송버스를 타기는 싫었다.
어떻게든 완주를 하고 싶었고, 결승점을 향해 몸부림을 쳤다.

5시간 51분 01초

최종기록이다.
지인은 Sub6 했다고 축하한다며 놀려댔다.

아무렴 어떠랴.
기록에 대한 아쉬움보단, 완주에 대한 만족감이 더 컸다.
더불어 아홉수의 우울함도 많이 떨쳐냈다.

더 열심히 살자.
회사에선 최선을 다해 일하고, 
집에선 최고의 남편과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자.
완주메달을 받으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많은 이들이 인생에 비유하는 스포츠로 골프, 야구, 마라톤이 있다.
경기시간이 길고, 드라마틱한 장면이 많이 나오기 때문일꺼다.
골프는 안쳐서 모르겠고, 
야구는 개인의 노력보다는 팀원들의 컨디션과 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런 점에서 인생이 마라톤 같았으면 좋겠다.
개인이 노력한만큼 성과가 나오는,
상대적으로 운이 작게 개입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가을의 전설이라 불리는 춘천마라톤.
나만의 전설을 썼고,
나와의 설전을 벌였다.

그렇게 서른아홉, 30대의 마지막 가을은 저물어 갔다.



이름: 한동규
배번: 1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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